................이르테면, 수안 금광은 일본 사람 야마구치에게, 야마구치는 다시 영국 공사(英國公使)에게, 그것을 다시 영*미*일 합자 회사로 넘어갔으며, 당고개의 금고개의 금광은 독일 사람 발터에게, 직산 금광은 일본 사람 시쿠자와에게, 갑산 동광(甲山銅鑛)은 청(淸)나라 사람인 강진황(江陳黃)에게 황실이 팔아넘긴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금광에서 외국으로 흘러나가는 상자에 쓰인 글씨가 'NO TOUCH' (노 터치)라는 것이었다. 조금쯤 유식한 말로 번역해 본다면, '촉수 엄금' (觸手嚴禁) 같은 것이었다고나 할까. 시쳇말로 '현금에 손대지 말라'였다.
이 '노 터치'가 우리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옮아가는 사이 와전(訛傳)되어, 드디어 지금의 '노다지'로 되었다는 것이 '노다지'라는 말밑(語源)에 대한 통설이다. 그러니까, 이말을 그대로 해석한다면, 조선 왕조 말기 우리 사회의 무지(無知)에 찬 비화(悲話)가 얽혀 있다는 것으로도 된다.
노다지 노다지 금노다지
노다지 파려거든
요 내 배알에서나 팔 것이지
노다지 노다지 금노다지
문전옥답 처넣더니
요 내 배알까지 처넣는구나
- 전라도 '노다지 타령'에서
'노다지'에 빗댄, 상당히 외설(猥褻)스런 타령이다. 노다지라면 자기으 '배 아래'에서 파라는 것이 아닌가. 그러지 않고 노다지 캔다고 논밭 팔아가며 날뛰다가 패가 망신하여 아내까지도 팔아넘겨야 했던 그 당시 사회상이 그대로 묘사되어 있가도 하다.
'노 터치' 하면 , 어째 폭발물의 포장지에나 알맞을 듯싶어지는 말이다. 그만큼 노다지는 그 말의 출발부터가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고 할 일이다. 우리 주변의 이른바 '노다지 자리'가 노다지 좋은 것만도 아니었다는 것이 실증되기도 한 관기 숙정(官紀肅正)이었다고나 해야 할 것인지 모르겠다.